토담집에서 참선을 하기 위하여 허리를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오늘 따라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내가 이 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신 어머니다. 딸을 셋이나 낳고 부처님께 아들을 달라는 원력을 세워서 발원하여 나를 낳고 낳은 후에도 자기의 분신처럼 돌아가실때까지 돌보아 준 어머니다. 지금 상상할 수도 없는 살기어려운 농촌에서 나를 서울로 대학까지 가르치었으니 그것이 기적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625동란이 난 어려운 시기에 밭에서 김을 매시다가 나를 불러 우리가 키우는 작물을 보아라. 밭을 잘 정리하고 정성스럽게 씨를 뿌리고 싹이 나면 정성스럽게 돌보아주고 자라는 동안 볼봐주어야만 가을에 원하는 만큼 수확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부도 하여야 할 때가 있다. 처음부터 잘 하지 못하면 시기를 놓치게 되고 시기를 놓치면 일을 성사 시킬 수가 없다. 이것을 시간이 나면 내 머리속에 박히도록 이야기를 하여 주시었다. 어머니는 솜씨가 좋으시어 싹 바느질을 하여 나의 옷을 만들어 입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가서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장독대 앞 한가운데 정안수가 언제나 깨끗하게 있었고 거기에서 어머니의 나에 대한 염원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어머니 덕에 나는 아무 어려움이 없이 대학교 직장생활 외국 유학과 대학교수를 무사히 마치고 정년한 후 시골 집과 같은 농촌에 와서 살수 있게 끔 되도록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늙으신 어머니께 할 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에서 생활하시는 어머니께 큰 글자로 된 예불독송경을 사다 드렸는데 시간만 나시면 이것을 읽으시었다. 그래서 그 책이 달고 달았다. 그 가운데 춘천에 오시어 5개월간 같이 살았는데 하루는 한달 후에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이곳에서 죽으면 너에게 많은 짐이 되니 시골로 가야한다고 네려다 달라고 하신다. 시골에는 정년을 하고 누나와 매형이 살고 있으니 시골 집으로 모시고 갔다. 한 달 후 매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사람을 알아 볼 수없으니 내려 오라고 하지만 학교 일이 있어 갈 수 없어 이틀 후 가 보았더니 사람을 못알아 본다는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이야기를 하시면서 종전에 보던 어머니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하루 저녁 어머니와 함께 어렸을 때 자던 방에서 자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발하기 전에 형님이 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연락을 한다는 말을 듣고 춘천으로 가기 위하여 출발하여 동네 밖으로 나갔을 때 또 사람을 알라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말씀하여 주시었다. 3일 후 충북대학교에서 강의를 의뢰가 와 강의하는 도중에 나에게 알 수 없는 기분이 왔지만 강의를 끝내고 춘천행 버스를 타고 출발을 하려는데 핸드폰을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시었다는 메모가 있었다. 춘천에서 오기가 멀으니까 청주에 왔을 때 부여로 오는 것이 빨리 오니까 그래서 그 때 운명을 거두신 것 같다. 2005년 9월 13일(음 8월 10일)로 향년 93세다. 살아 계시는 동안 몸은 아프시지만 병원 한번 안 가시고 삶을 사는 어머니, 어려움 속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에게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은 어머니, 언제나 나만 잘 되는 것을 원력으로 삼고 삶을 영위하신 어머니가 토담집에서 생각이 나서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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