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교수님께서 쓰신 성씨지묘(成氏之墓)를 읽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15년 4월 16일 새벽에 일어나니 북두칠성과 많은 별에서 품어나는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완연한 봄으로 농촌산골마을에는 바쁨으로 시작하는 목요일입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선물 받았네요. 어제는 다음 카페 연호마을에 김동길교수님이 쓰신 성씨지묘를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하루이었다. 내용은 성상문 할아버지에 대한 글이다. 성삼문할아버지 덕분에 우리 성가는 벼슬보다는 과학자나 다른 곳에 종사하면서 그런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300명이나 되지만 딱 한사람인 고성완종 전국회위원 일가가 요사이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뒤 흔들고 있다. 성상문할아버지도 그 당시에는 역적으로 몰리어 친족원들이 모두 죽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진가를 알려지게 되었다. 고 성완종 일가의 죽음을 보면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양심대로 말과 행동을 보여주면 별 문제가 될 것도 없다고 본다, 이번 계기로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앞으로 더욱 더 양심이 있고 정직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국가가 되는데 밑거름이 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여 본다. 오늘은 동충하초 연구를 위하여 다님녀서 찍은 사진을 올려놓고 과학자로써 정직하게 살아 걸림이 없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려고 한다. 김동길 교수님 글을 함께 올린다. 오늘도 인연이 있는 도반님 편안하고 행복하신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성씨지묘(成氏之墓)
사)육신(死六臣)의 변(變)은 세조 2년인 1456년 6월에 벌어진 혁명도 아니고 난(亂)도 아니고 단지 다섯 사람의 집현전 선비들과 한 사람의 무인(武人) 유응부가 모의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불발로 끝난 ‘변’ - 애달픈 꿈 처참한 악몽으로 막을 내린 끔찍한 불상사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스승 함석헌은 이성계의 야욕에서 비롯된 조선조 500년이 우리 역사 5천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성삼문과 박팽년 하위지와 이개 그리고 유성원과 유응부의 흘린 의로운 피가 한 줄기 빛이 되어 그 어두움을 밝힌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성삼문과 그의 동지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불의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성삼문이 인두로 그의 등을 지지는 형리를 향해 “이 놈아 식었다 더 달구어 오너라”고 일갈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가 거열(車裂)당하게 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이렇게 읊었답니다.
북소리 덩덩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황천길에는 여인숙 하나도 없다는데 이 밤을 뉘 집에 묵어 갈건가 이 시를 암송할 때엔 내 눈에 눈물이 어립니다. 성삼문의 아버님도 그의 동생 셋도 그리고 그의 아들 넷도 (막내는 아직도 젖먹이였다는데!) 몽땅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자의 난’으로 피를 강처럼 흘린 태종(이방원)의 허리에서 성군(世宗大王)이 태어난 것이 기적이었다면 세종의 몸에서 세조가 태어난 사실 또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량진 언덕의사육신의 묘역을 찾았습니다. 거기에 성삼문지묘(成三問之墓)는없고 다만 성씨지묘(成氏之墓)만 있었습니다. 불세출(不世出)의 영웅호걸에게는 이름은 없고 성씨(姓氏)만 있는 겁니까?
김동길
'사는 이야기 > 살아가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대윤명예교수로부터 메일로 온 인디언의 기도문(祈禱文) (0) | 2015.04.18 |
---|---|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유롭게 보내려고 한다. (0) | 2015.04.17 |
백목련꽃을 보면서 다음 생을 생각하여 보는 시간을 가지었다. (0) | 2015.04.12 |
교수님 올해는 무슨 작물을 심어야 하나요? (0) | 2015.04.10 |
서울에서 가서 성진근회장님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0) | 2015.04.04 |